C종교집단 P회장, 그는 과연 죽었나? 살았나?

류재복 기자 | 기사입력 2015/01/19 [16:10]

C종교집단 P회장, 그는 과연 죽었나? 살았나?

류재복 기자 | 입력 : 2015/01/19 [16:10]

 
▲     © 류재복

    C종교집단 P회장, 그는 과연 죽었나? 살았나?
         한국의 신흥종교로 유명세를 탔던 박 모 장로의 후계자
 
[류재복 대기자]
일명 S그룹으로 일컫는 C종교집단 후계자 P회장, 그는 땅으로 꺼졌나? 아니면 하늘로 솟았나? 그는 1949년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S그룹 설립자로 알려진 박 모 장로다. 한국전쟁의 포성이 멈춘 지 불과 2년 후인 1955년, 부천시 4개동 일대 10만평에 신도들의 집단촌 S촌이 들어선다. 그때 그는 땡전 한 푼 없는 가난뱅이였다. 1962년 덕소에 제2 S촌, 1970년 부산에 제3 S촌을 세웠다. 이것은 부동산을 사재기하고 신도들의 주머니를 털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거액의 돈을 움켜쥔 그는 점차 이단성을 보였다.
첫째는 말세론이다. 내일, 아니 3년 후 세상에 종말의 날이 올 것처럼 설교를 한다. 이렇게 위기감을 조성하여 신도들을 가혹한 노동으로 몰아넣고 저임금으로 부려먹었다. 이것이 문제가 되면 공무원들을 매수하여 무마했다. 둘째는 여성 편력이다. 그는 소위 천국행 섹스안찰을 착안한다. 물론 60년대부터 간혹 섹스안찰로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를 통해 사업 부진을 만회한다. 여러 차례 부도를 맞지만 돈 있고 잘 생긴 여자들만 골라서 은밀하게 섹스를 즐긴다. 이를 알게 된 여인들의 남편이 간통죄로 고소하자 이혼을 조장하여 법의 심판을 피해간다.
셋째는 자칭 하나님이다. 1980년 박 모 장로는 자신이 1조5천살의 하나님이라고 선포한다. 또 자기는 영생 불사한다고 외쳤으나 1990년 2월 7일 의문의 죽음을 맞는다. 그의 장례식에 세 아들 누구도 참석하지 않은 것은 지금도 의문이다. 얼마 후 나타난 셋째아들이 S촌의 교권을 장악하고 후계자 반열에 오른다. 넷째는 부정축재 및 횡령 외화반출 인권유린(임금착취) 등이다.
S그룹 C종교집단 후계자 P회장, 2014년 12월 현재, 그는 땅으로 꺼졌나? 아니면 하늘로 올라갔나?. 그가 실종된 사건은 현직 H 목사가 발표한 한 소설에서 실마리가 주어졌다. H목사는 현재 P회장에 대한 실종선고 심판청구를 했고 P회장과는 00초중고 동창이다. 먼저 H 목사의 말을 들어본다. “S촌을 만든 박 장로는 아들 3형제를 두었다. 이들은 박 장로가 1990년 세상을 떠난 후 유산을 둘러싸고 사활을 건 소송을 펼쳤지만 두 형은 모두 패소했다. 그 후 이들은 서로 연락을 끊고 은둔생활로 들어갔다. 하지만 사람이 이 땅 어디엔가 살아있으면 반드시 움직임이 포착되게 마련이다. 1990년대 후반 부천 S촌에 개발의 열풍이 불면서 박 장로의 아들 P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고 말했다.
             12년친구인 H목사 “1999년 만난 후 현재까지 본 적 없어”
H목사는 또 “2004년 이후 P를 봤다는 사람이 없다. 내가 1999년 부산에서 극비리에 그를 만났다. 나의 아버지와 박 장로는 동갑내기 친구이자 S촌 개발의 주역이었다. 또 박 장로의 아들 P와 나는 초중고 12년을 한 반에서 공부했다. P가 살아있다면 왜 이렇게 오랫동안 보이지를 않는가? 그래서 의문이다.
박 장로의 장남 박00, 그는 현재 70줄에 들어섰지만 젊은 시절 방탕으로 병마에 시달리면서 살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평창동에서 살다가 일산으로 이사한 것으로 나타나있다. 둘째 박00은 그중 가장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으며 골프 실력이 거의 프로급으로 알려져 있다. 부산 S촌에 가끔 내려가 골프를 즐긴다는 소식이 있지만 여전히 은둔의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둘째 박00 역시 사람들의 눈에 쉽게 띄지 않고 있다. 일부는 그가 사업을 한다는 말도 있으나 그건 말뿐이며 행방이 묘연한 상태다. 이는 예전부터 친분관계로 그와 최근까지 만났다는 박 모 씨의 증언이다. 박 장로의 큰아들은 그간 화제를 몰고 다닌 풍운아였다.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르면서 아버지 박 장로는 장남을 신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 곁은 끝까지 지킨 막내 P에게 후계자 자리가 돌아갔다는 설도 있다. 하지만 가장 가까이에서 있으며 일을 배운 막내 P에게 끌리는 것은 당연지사였을 것이다. 세간의 눈길을 끌었던 장남은 지금도 권토중래(捲土重來)를 노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를 잘 아는 김00 목사는 “박00씨는 잘 살고 있다. 막내에게 후계자 자리를 빼앗기고 나서 의욕을 잃었지만 벌써 70줄에 들어섰다. 가끔 통화를 하고 있다. 분명히 살아있다”고 말했다. 여기서 문제는 C종교집단의 천문학적인 재산과 전권을 물려받은 박 장로 셋째아들 P의 생사여부다. S촌 안에서 사는 사람조차도 그의 생사에 의문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박 장로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 S촌 거주자들조차도 P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2년 전 S촌에서 판매 실적이 부진하다는 이유로 맨몸으로 쫓겨난 이수진(가명) 씨의 말이다.
“1999년 5월인가 기억이 되는데 박 장로의 묘가 있는 곳으로 산책하러 갔는데 할머니 두 분이 어떤 남자가 서있으니까 ‘아이고, 우리 회장님’ 하면서 인사를 하더라. 그래서 나도 회장님께 인사를 하고 내려왔다. 그러고 3년쯤 지난 2002년에 한 번 보고 못 봤다. 어딘지 좀 이상했다.”고 그는 털어놓았다.
                C종교집단은 북한보다 더 통제된 수용소 같은 곳
S촌은 철저한 통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그곳의 소식보다 북한의 김정은 소식을 더 많이 듣고 있다. S촌은 인터넷에 함부로 접속해도 안 된다. 간부들은 그곳의 내부 소식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봐 인터넷을 감시하고 있다. 인터넷 감시를 전담하는 요원들이 별도로 있다. 이들의 임무는 S촌 사람들이 불만을 올리거나 외부에 좋지 않은 소식을 올리지 못하도록 감시하는 것이다.
이수진 씨는 “나는 가끔 S촌 사진을 찍어서 블로그에 올렸다. 그러자 그들은 ‘이 사진은 삭제하라 이런 사진은 올리지 마라’는 등 통제가 보통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P회장의 생사가 미궁에 빠지는 거다. 사실 S촌 사람들은 P회장이 안보여도 말을 한마디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2004년 1월 어느 날, 이날은 부산시가 S촌에 하수종말처리장을 설치한다고 해서 S촌 사람들이 집단으로 항의하러 나간 날이다. 사람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나이가 많은 여자 몇 백 명밖에 안 되었다. 부산시가 얼마나 S촌을 우습게 봤으면 용역을 1000명이나 동원해서 사람들을 개 패듯 다뤘다고 한다. 이렇게 S촌이 누란의 위기를 당하고 있는데도 누구 하나 나서서 S촌 사람들을 보호하려들지 않았다. 이 와중에 할머니 한 분이 부산시가 동원한 용역에게 맞아 현장에서 즉사했다. 이런데도 P회장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그곳의 일부 사람들은 그 순간 “P회장님이 우리를 살려주시겠지” 하면서 서럽게 울었다고 한다. S촌에는 기가 막힌 사건이 하나 또 있다. P회장은 90년대 말에 부산 00에 부지를 기증하였다. 부산시는 S촌에서 기증받은 부지에 00군청을 지었다. 바로 그 왼쪽에 S촌 정문을 수십억 원을 들여 건설했다. 그런데 문제는 00군이 건축 허가를 해주고는 사용허가를 내주지 않는 것이었다. 이렇게 00군이 S촌을 무시하고 있는 데도 P회장은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이수진 씨는 또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부산시가 동원한 용역들이 사람을 패죽였는데도 경찰은 보고만 있었다. 더 가관인 것은 가족들이 피해보상을 가해자인 부산시에 요구하지 않고 C종교집단에 요구해 종단에서 2억 원을 보상했고 형사책임도 졌다. 사람은 부산시가 고용한 용역들이 죽였는데 피해보상은 C종교집단이 해 주었다. P회장이 있었으면 이렇게 했겠나? P회장이 그렇게 호락호락 타협할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집단 불상사에도 최고 책임자로서 현장에 나타나지 않아
이후 S촌의 토지를 기증받아 00군 청사를 신축하고 2002년 아시안게임용 체육관을 S촌 땅에 건설한 안00 부산시장이 옥중에서 자살한 사건이 일어났다. 그로부터 40여일 후 대한민국 헌정 사상 최초로 대통령이 탄핵을 당하여 직무가 정지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과연 이 같은 연속적인 사건과 S촌은 관련이 없을까?
부산시는 C종교집단 으로부터 00군청 부지를 공공용지 협의 취득이라는 명분으로 기증받았다. 이런 논리에서 구원파 본부가 있는 금수원의 땅을 어느 지자체가 기증받아 공공건물을 지었다면 문제가 안 될까? 2003년 P회장실종, 2004년 2월 안 모 전 부산시장 자살,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2005년 P의 실종신고, 2008년 P의 한정치산자 신고, 2009년 5월 대통령 자살 등에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는 않을까?
이에 대해 H목사는 “내가 추측컨대 2004년을 전후해서 박 회장에게 무슨 변고(變故)가 생긴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내가 1999년 말에 그를 부산에 가서 만났다. 그때 P가 나에게 “혹시 나한테 어떤 사고가 생기면 네가 C종교집단을 정상으로 돌려놓기 바란다.”고 말하였다. 그때 P는 자기의 운명을 내다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2005년 4월, 박 회장의 큰형 박00은 부산가정법원에 동생 P의 실종신고를 하였다. 이것은 심판청구로 P가 살아있는지 법원이 판결을 해달라는 것이었다. 이미 2005년에 P의 생존 문제가 형제들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형이 동생의 실종신고를 하게 된 배경을 김 모 목사에게 들어보았다.
               P회장의 형들, 실종선고 심판청구 했으나 흐지부지 돼
“그때 P의 큰형 박00은 동생의 행방에 대해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나한테 와서 몇 번인가 동생에 대해 얘기를 했다. 그러나 동생이 실종되거나 살해되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로부터 1년 후 그는 동생에 대한 실종선고 청구를 취하했다. 당시 동생의 실종선고 심판청구를 한 형의 증언이다. “그 당시 나는 S촌 내부 사람한테서 내 동생이 실종되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래서 실종신고를 냈는데 그쪽에서 엄청나게 방해공작을 하였다. 집밖을 못나갈 정도로 우리 집을 에워 쌓았다. 까딱하면 죽일 것 같은 기세였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실종신고를 철회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P의 형을 잘 아는 김 모 목사는 “부산00법원은 청구인 박00에게 가족들 모두의 동의를 받아오라고 했다. 이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법원은 알고 있었다. 둘째 박00과는 너무 생각과 삶을 보는 시각이 괴리가 있어 가족들의 동의는 애당초 안 되는 것이었다. 결국 형은 소를 취하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3년 후 P의 형 박00은 또 동생에 대해 한정치산 선고를 청구했다. 이것은 실종신고 실패에 이은 것으로 이걸 통해서 동생을 법정으로 끌어낼 속셈이었다. 하지만 이것도 결국 가족들의 동의를 얻지 못해 소를 취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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